공백기를 돌아보며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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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중순에 마지막 실업급여를 받았다. 퇴사 이후 6개월이 지난 시점이었다. 작년 10월, 근무하던 오피스가 폐지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본사로 근무지를 이동하거나, 그만두는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구조조정 소식도 들려왔다. 근무지와 거주지 모두 옮기는 건 아무래도 리스크가 컸다. 결국 내게 많은 기회와 좋은 경험을 주었던 고마운 회사를 떠나게 됐다. 당시에는 바로 이직하려는 마음이 컸다. 공백 투성인 나의 과거에 또 하나의 구멍이 생기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커리어에 오점이 남는 것 뿐만 아니라 조금이라도 모았던 돈을 써야하는 상황에 대한 염려도 있었다. 하지만 그 뒷일은 내 기대처럼 흘러가지 않았다. 좋은 인상을 받았던 회사 중 면접까지 갔던 곳에서는 원했던 결과를 얻지 못했다. 다른 몇몇 회사에서 기회가 생기기도 했지만, 성급한 선택을 하고 싶지 않아 기회를 내려 놓았던 순간도 있었다. 확실히 취업 빙하기라는 말이 와닿기도 했다. 매력적인 포지션이 많지 않았다.

점점 시간이 흘렀고 약간의 공백이 생기기 시작했다. 초심과 방향을 달리했다. LLM을 활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전 직장 동료들이 각각 속해있는 두 팀과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한편, 사회적 약자를 위한 코칭 플랫폼을 만드는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도 했다. 총 3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된 셈인데, 점점 바빠지게 되면서 오픈소스 프로젝트에는 거의 기여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이때 배운 것을 과제 코드에 녹여내면서 결과적으로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프로젝트 중 하나는 개발자가 나 혼자여서 책임이 컸다. 여러 아이디어를 검증하고 프로토타입을 개발했다. 매주 아이디어 회의가 길었지만 크게 성과가 나지 않았다. 차별화된 매력적인 아이디어를 만드는건 어려웠다. 유일한 개발자인 내가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못해서 프로젝트 하나를 제대로 완성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다른 하나의 프로젝트와 다른 지식을 학습하는데 시간을 많이 쏟았기 때문이다. 앞서 디자인이 많이 진행됐기 때문에 디자이너 동료분께 죄송한 마음이 컸다. 그럼에도 여전히 모임은 유지되고 있다. 2주마다 한번씩 서로의 근황과 새로운 소식을 공유하는 자리를 갖는다. 지금은 약간 사교모임이 된 것 같지만, 서로의 생각을 진솔하게 나눴던 경험이 각자에게 어떤 토대가 될 것이란 기대가 생겼다. 다른 프로젝트 하나는 이전 직장의 백엔드 개발자이자 기획자였던 분이 속한 팀과 함께 했다. 이미 많은 기능이 개발된 프로젝트에 나중에 조인했다. 플러터를 새로 익히고 여러 기여를 하며 좋은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최근에는 오픈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곧 입사를 하게 된다면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참 잡다하게도 많은 것들을 했다. Neovim을 좀더 잘 다룰 수 있게 되었고 LLM을 활용한 간단한 앱을 개발해보기도 했다. 여러 프로젝트를 병행하며 동시에 많은 일에 기여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됐다. 한편 이력서를 꾸준하게 내보고 다듬는 과정을 반복했다. 서류 합격률은 저조했지만, 이따금씩 알고리즘 테스트를 치르기도 했다. 시험을 준비하면서, 평소에 대비하지 못했던 나를 책망하기도 했다. 기초 체력은 이직 시점이 아닌 평소에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3, 4월이 되자 새로운 채용공고가 확연하게 늘어난 것이 눈에 띄었다. 회사에서 요하는 경험과 기술이 나의 그것과 어느 정도 일치한다면 대부분 지원했다. 서류 합격률이 조금 올라갔다. 서류 합격의 예측은 참 어려웠다. 이력서에 여러 변화를 주었지만 합격과 불합격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았다. 지원 회사의 사업, 제품, 인재상, 자격 요건에 맞게 이력서를 썼을 때 합격이 더 잘된다고 느끼진 못했다. 반면, 그렇게 이력서를 쓰지 않았던 회사에서 면접 기회가 오기도 했다. 심지어 회사의 면면만 보자면 후자가 더 나은 회사인 경우가 많았다. 어느 정도 이력서가 완성됐다면 그때부터는 이력서에 더 시간을 쏟기 보다는 다른 경험에 공을 들이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한편 포트폴리오를 만들어 같이 첨부하기도 했는데 서류 합격률이 조금 더 올라갔다고 느꼈다. 하지만 유의미할 정도로 차이가 크지 않았다. 최종 합격된 회사들에 지원할 당시에는 포트폴리오를 첨부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크게 득을 본 것은 아니었다.

여러 차례 면접을 진행하며 내 지식과 화법을 다듬기도 했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담백하게 말하고 아는 것은 최대한 말하기, 굳이 더 잘보이려고 노력하지 않되 자신감있게 말하고자 했다. 나한테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려다 보면 자기모순이 드러나 면접 자리에서 스스로 함정을 만들기 쉽다. 평소 자기 자신을 한없이 낮추려는 성격과 화법이 면접에서는 자신감 부족이라는 모습으로 보여졌던 경험에서도 교훈을 얻고자 했다. 몇몇 회사에서는 이 전략(?)이 잘 먹혔던 것 같다. 하지만 면접 도중에 욕심이 생겨 이러한 마음을 유지하지 못한 적도 있다. 내가 가진 것보다 더 보여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인해 매끄럽게 답변하지 못한 순간이 있었는데 면접이 끝나고 그 여운이 길게 남았다. 수행이 여전히 부족하구나 싶었다. 하지만 운 좋게도 이 면접에서 합격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이어지는 컬처핏 면접도 통과했다. 채용 과정에서 "자신감을 가져도 좋습니다."라는 피드백을 몇차례 받았다. 남들의 눈에는 여전히 자신감 부족으로 비춰지는구나 싶었다. 남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길레..?!

5월 22일, 뤼이드로부터 받은 최종 제안을 수락했다. 그전에 다른 회사의 입사를 앞두고 있었지만, 죄송하다는 말씀과 함께 번복 의사를 전달했다. 두 회사의 채용 과정에서 모두 좋은 느낌을 받았고, 최종 협상된 처우도 비슷했다. 그렇기에 고민을 많이 했고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야만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얼까? 내가 경험해보고 싶은 기술, 도메인은 무엇인가? 개발자로서 더 큰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회사는 어떤 곳일까? 등등... 스스로 묻고 답하며 최종적으로 결정한 곳은 뤼이드였다. 우선 제품과 도메인에 대한 관심이 컸다. 또한 뤼이드는 상대적으로 규모있는 프론트엔드 팀이 있어 내게 자극을 줄 수있는 환경이 될거란 기대가 있었다. 게다가 과제나 면접 경험도 크게 작용했다. 과제도 좋았고 과제 기반의 면접 질문도 좋았다. 부족함을 많이 느꼈던 면접인 만큼 합격을 기대하진 않았다. 그런데 예상외로 합격 소식을 받았고 컬처핏 면접을 보았다. 컬처핏 면접에서도 다른 의미로 좋은 인상을 받았다. 우선 대표님이 아주 말씀을 잘하신다는 느낌을 받았고 그 내용이 평소의 깊은 사고에서 나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내 성격을 꿰뚫어 보셨는지, 용기를 북돋아 주는 진심어린 조언이 기억에 남는다.

취업 성공에 주요했던 것을 돌이켜본다. 사실 취업을 위한 촘촘한 계획은 없었다. 계획보다는 이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고자 했다. 하고 싶은 일, 경험해보지 못한 일을 하는 방향으로 공백기를 채웠다. 만약 취업이라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었다면, 알고리즘과 웹 프론트엔드에 특화된 경험과 지식을 쌓는데 집중했을 가능성이 높다. 공교롭게도 공백기에 했던 일 하나하나가 큰 도움이 되었고 무엇하나 버릴 것이 없었다. 뤼이드에서는 일반적인 웹 기술 스택뿐만 아니라 플러터 경험을 우대하기도 했는데, 여기서 플러터 프로젝트 경험이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AI를 많이 활용했던 것도 마찬가지로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여러 AI 제품을 써보고 간단한 LLM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 바이브코딩을 했던 경험을 블로그에 작성했다. 이번 취업 과정에서 많은 회사들이 AI를 잘 활용할 줄 아는 사람을 원한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과제에서도 오픈소스 프로젝트에 참여하며 배웠던 경험을 녹여냈다. 테스트하기 좋은 코드 작성하기, 추상화 벽 세우기 등 이런 흔적들이 어떤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실제로 면접에서 이에 대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답변을 잘 하지는 못했지만 과제 점수가 여러 차례 업급되었던 것을 보면 과제에서 나쁘지 않은 평가를 받았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는 취업을 목표로 준비하기 보다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경험과 역량을 쌓으려는 의도가 크게 먹혔던 셈이다.

서른 다섯, 개발자를 계획하고 서른 여섯, 첫 커리어를 시작했다. 너무 늦은 나이다. 뒤늦게 개발자 커리어 전환을 고민하는 글을 검색해 본적도 있다. 부정적 반응의 댓글이 대부분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서비스를 개발하는 회사에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서른 아홉에 그 다음 커리어도 이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정보, 특히 조언 성격의 내용이 내 현실에 맞닿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운다. 어쩌면 너무도 현실적이기 때문에 내 현실이 아닐 수 있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생각을 받아 들였던 것이 내 인생에서 족쇄가 되었던 경험이 있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특히 그것이 내 인생의 방향에 관한 것일 땐, 타인의 조언에 너무 휘둘리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누군가 틀리다고 하는 방향은 전례가 많지 않은 것뿐 오답이 아닐 수 있다. 뤼이드 대표님이 해주셨던 말씀 중 인생의 궤적이라는 표현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내 과거를 좋게 포장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답변했다. 다른 맥락에서의 대화이지만, 중요한건 무브먼트라는 말씀도 해주셨다. 스타트업에서는 실패하는 경험을 높게 산다. 하지만 나의 실패는 무위의 실패에 가깝다. 돈은 벌어야 했기에 항상 일을 했고 다양한 경험을 했지만 어려운 일에 도전했던 흔적은 거의 없다. 개발자가 나의 첫 도전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다음 기회가 주어졌으니 앞으로 많은 도전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출근은 5월 28일부터 하기로 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그전까지 소홀히 했던 것들은 조금이나마 챙기려고 한다.

published 9 months ago · last updated 9 months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