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습 회고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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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직장 생활이 벌써 세 달이나 지났다. 수습 기간이 끝날 즈음 인근 카페에서 팀장님과 미팅 시간을 가졌다. 한시간 이십분 정도의 대화는 내 예상보다 길었다. 선릉에 있는 카페 중 점심 시간에 조용한 곳을 찾기는 어렵다. 역시나 카페는 무척이나 혼잡스럽고 시끄러웠다. 직장인들의 점심 시간이 끝날 무렵, 사람들이 줄어들었다. 내가 시킨 메뉴는 말차가 들어간 음료로 당초 기대와는 다르게 오직 말차 맛만 강하게 느껴졌다. 달달한 말차 라떼를 예상했는데, 메뉴를 대충 보고 주문한 내 실수였다. 다소 텁텁하긴 했지만 건강한 느낌이 싫지는 않았다. 팀장님이 내게 일하는건 어떤지 여쭤보는 것으로 대화가 시작되었던 것 같다. 만족하는 일들, 아쉽다고 생각했던 환경 등을 가감없이 말하고 서로에게 궁금했던 내용을 나눴다. 회사나 팀에 기대에 미치지 못해 혹여 계약이 끝나는 상황도 염두하고 있었다는 진담섞인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쏜살같던 지난 세 달을 그 자리에서 짧게라도 회상해보려는 시도는 어려웠다. 나는 그동안 무얼했고, 무얼 느꼈을까

첫 달은 기본적인 업무 시스템을 익히고 가벼운 작업을 하면서 코드와 제품에 대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팀에서 맡고 있는 라인업은 모두 네 개인데, 그 중 세 개를 조금씩 건드려 보았다. 제품마다 특징이 뚜렷한데, 사용자만큼 레거시도 많은 프로젝트 하나, 내부 직원들이 사용하는 역사 깊은 백오피스 하나, 출시한지 얼마되지 않은 신규 프로젝트 하나를 각각 경험했다. 배포 방식, 코드 컨벤션 등 정리된 문서도 꽤나 있었지만, 대부분 오래 전에 작성된 문서인지라 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문서도 코드처럼 관리되지 않으면 낡아버린 뒤 부채로 남겨진다. 불필요한 문서는 지워버리고 틈틈이 문서를 수정하고 싶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온보딩 또한 아쉽게도 체계적이진 않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바로 제품 개발에 뛰어들어야 하는 하드 랜딩에 가까웠다. 하지만 프로세스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팀에서는 충분한 여유를 주었고 압박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수습이 끝날 때까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 알기는 어려웠다.

이후 한 달은 주로 신규 프로젝트의 태블릿 UI 대응 작업을 진행했다. QA 단계에서 이전부터 존재하던 버그가 많이 발견됐다. 일정 내에 모두 고치느라 다소 바빠지기도 했다. 특히 크로스 플랫폼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발견되는 문제가 많았다. 웹에서는 문제가 없는데 앱에서만 발생하는 이슈라던지, 안드로이드는 괜찮은데 iOS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라던지, 기능 개발보다는 여러 플랫폼의 다양한 기기에서 정상 동작을 확인하는 과정이 더 길어지는 경우도 잦다. 이처럼 변수가 많다보니 처음에는 웹뷰로 서비스를 제공하던 회사들도 결국 앱 팀을 따로 꾸리는 방향으로 트는건가 싶다. 한편으론 난이도만큼 경험 축적이 가치있는 기술 영역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초기 단계이지만 제품에 대해서 아쉬움이 없진 않다. 유능한 분들이 기획한 제품이지만, 경쟁사 대비 충분히 뾰족하고 탁월한지 모르겠다. 기능의 외연을 확장하기 보다는 작더라도 강한 임팩트를 주는 제품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요즘이다.

최근에는 신규 기능 개발을 담당하고 특히 앱 작업 위주로 맡고 있다. 앱은 웹뷰 서빙 용도로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새로운 기능 구현을 위해서는 앱 개발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팀에서 한 분을 제외하고는 Dart, Flutter 경험이 없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경험이 있던 내가 맡게 된 셈이다. 입사 전 다른 프로젝트에서 플러터를 사용했던 경험이 빛을 발했다고 해야할까. 다만 웹뷰, 리버팟 등 사용해보지 않았던 기술이 대부분이었다. 초반에는 기존 코드를 익히는데 시간을 쏟아야 했다. 신규 기능은 팀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종류여서 많은 리서치와 실험이 필요했다. 새로운 것을 해볼 수 있어서 재미를 느끼며 참여하고 있다.

일하는 방식에 대해서 아쉬움이 없진 않다. 이전 직장에서도 제품 중심으로 뭉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기능 조직 중심으로 일한다. 이런 구조에서는 제품을 최우선으로 협업하기 보다는 각자의 기능에 충실하기 쉽다. 회사의 의사 결정 또한 하향식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사 결정의 근거는 당장의 매출, 즉 재무제표에 찍히는 숫자인 것 같다. 경영하는 입장에서 보는 시각은 내가 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넓고 멀리 뻗어있다라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숫자를 먼저 찍는 방향으로 제품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 또한 순서가 틀렸다는 점은 명백해 보인다. 큰 숫자를 찍기 위해서는 사용자가 만족할 수 있는 좋은 제품이 먼저이지 않을까.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점은 알고 있다. 단기간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렇게 이해관계자가 많은 구조에서는 희망을 품기 어려울 지도 모른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할까? 내가 경영자라면 어떤 구조를 만들어야 할까?

그럼에도 내게 과분한 회사라고 생각하며 감사한 기회라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회사에는 인성이나 실력 면에서 좋은 분들이 많아 보인다. 내게 새로운 경험과 배움을 줄 수 있는 회사라는 점에서 만족하며 다니고 있다. 현재 느끼는 불편함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직접 개선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조급한 마음이 드는 것은 아니지만, 지난 세 달동안 양질의 기여를 많이 하진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내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좋은 제품을 만들고 업무 환경을 개선하는데 힘을 쏟고 싶다. 개발자를 시작했을 때와 지금을 비교하자면 나를 둘러싼 환경이 매우 달라졌다. 투자 시장은 얼어 붙고 개발자 채용은 예전같지 않다. 그나마 요즘 나아지고 있지만, AI 때문인지 신입이나 주니어 취업은 여전히 녹록치 않다. 쉽지 않은 상황이지만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무언가를 만들고 코딩을 배우는 것은 그 어느 때보다 쉽기 때문이다. 혼자서 적은 비용으로 할 수 있는 것들이 많아진 상황이다. 이를 잘 활용하면 당장 코딩으로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이전 직장, 그러니까 개발자로서의 첫 회사에서도 수습이 끝난 직후 회고를 작성했었다. 당시 글을 살펴보니, 지금의 감정과 그때의 것이 사뭇 달랐다. 첫 수습 시절에는 스스로에 대한 의심을 점점 걷어내고 있던 과정이었다. 특히 개발자로서 계속 연명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고 있던게 느껴졌다. 나름 수습 기간을 잘 끝냈던터라 자신감도 엿보였다. 한편, 지금은 단순히 개발자로서의 삶을 이어나가는 것 보다는 어떤 기술을 도구로 삼아 어떤 제품을 만들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회사나 개발자라는 직업보다는 잘 만든 제품을 세상에 선보이고 싶다는 마음이 더 크다. 만족할 수 있는 경험만 할 수 있다면 회사의 규모는 중요하지 않고 혼자여도 좋다는 생각을 한다는 생각이 든다.

회고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돌이켜 보면 운이 참 좋았다. 늦은 나이에 개발자를 시작할 수 있었고, 다행스럽 재취업도 할 수 있었다. 앞으로는 구직자로서 경쟁력을 갖추는 방향이 내게 적합할지 잘 모르겠다. 그나마 확신할 수 있는건 계속해서 뭔가를 시도하는 것이 더 나은 길을 찾을 수 있는 확률을 높여준다는 것 정도가 아닐까. 단기적인 목표 몇 개만 세워봐야겠다.

published 5 months ago · last updated 5 months ag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