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 to w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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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회사를 거치며, 나는 어떤 환경에서 일하고 싶은지 점점 선명해진다. 돌아보면 마냥 나쁜 곳도, 그저 좋기만 한 곳도 없었다.

한때는 인천공항의 기계 시설을 점검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정해진 일정에 따라 반복되는 루틴은 지루했지만, 동시에 예측 가능하다는 점에서 안정적이기도 했다. 불확실성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장점으로 여겼을 것이다. 근무 강도도 높지 않아 몸은 편했지만, 오히려 그런 안정감이 내겐 '인생이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한' 답답함으로 다가왔다. 웬만하면 정년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자리였고, 경력을 쌓아 자격증도 취득할 수 있었지만,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오래 머무를 자신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일자리는, 특허법인에서 명세사로 일했던 때를 제외하면, 이전에 내가 경험한 대부분의 직장보다 나은 환경이었다. 그 전까지는 육체노동을 하거나, 의류업·카페 같은 서비스업에 종사했다. 교체되기 쉬운 일자리였고, 보수는 대체로 최저시급에 가까웠다. 전문성을 쌓기도 어려운 구조였다.

한때는 특허법인을 그만둔 일을 후회하기도 했다. 나를 배려해준 분들이 많았고, 다시 돌아오라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변리사 시험을 준비할 자신도 없었고, 무엇보다 가족과의 불화로 마음이 복잡했다. 감정적으로 그만뒀던 그 선택은, 긴 방황의 시작이었다. 이후 8년 넘는 시간 동안 나는 뚜렷한 목표 없이 다양한 일을 전전했다. 생계를 위해 일하긴 했지만, 경험에 의미를 느끼며 일한 적은 드물었다.

그렇게 살다가, 서른한 살이 되던 해, 결국 내 삶을 감당하지 못하고 호주로 떠났다.

멜번에서 바텐더 동료의 일을 도와주며 간간이 수입을 벌었다. 예상치 못한 코로나19의 여파로 가게들이 셧다운되면서 귀국이 앞당겨졌다. 기회가 된다면 눌러앉을 생각도 있었지만, 제대로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다시 한국 땅을 밟았다.

귀국 후 한국토지주택공사에서 7개월간 기간제로 일하게 되었다. 사업 및 시공관리 업무였고, 근무 강도에 비해 보수가 괜찮은 편이었다. 계약이 끝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었기에,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 여유 속에서 '새로운 걸 해보자'는 마음이 처음 생겼다. 호주에서 경험한 바텐더를 도왔던 경험이 나름 즐거웠기에, 조주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하고 관련 일자리를 알아보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전혀 다른 방향의 선택을 하게 된다. 바로, 코딩이다.

오래전부터 관심은 있었지만, 개발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어떤 계기였는지는 흐릿하지만, 노마드코더 강의를 따라 해보면서 자연스럽게 빠져들었다. 재미가 붙고 나니 부트캠프와 다른 프로그램에도 참여하며 점점 진지해졌다. 당시엔 의식하지 못했지만, 때마침 개발자 구직 붐이 일던 시기였고, 운 좋게도 비교적 늦은 나이에 개발자로 커리어를 시작할 수 있었다. 요즘 같은 시기였다면 아마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첫 개발자 직장에서는 3년을 채우지 못하고 나왔다. 내가 소속된 지사가 경영난으로 폐지되었고, 권고사직의 분위기도 이어졌다. 본사로 와도 좋다는 제안을 받았지만 그만두기로 결정했다. 대전으로 가는 것도 여러모로 위험한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아쉬웠지만, 적절한 시점에 떠난 결정이었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기술을 실무에 적용해볼 수 있었고, 그 덕에 연차에 비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이후 짧은 휴식기를 거쳐 다시 구직에 나섰다. 채용 시장은 예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두 곳에서 최종 합격을 받을 수 있었다.

그중 B2C 서비스를 운영하는 회사로 이직했다. 사용자와 좀더 맞닿는 서비스를 개발해보고 싶었고, 실제로 많은 유저가 사용하는 제품이라 새로운 경험을 쌓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개발자로 임했던 첫 회사는 시리즈 B, 현재 다니고 있는 회사는 시리즈 B 규모의 스타트업이다. 두 곳에 불과하지만, 그간의 경험으로 어떤 곳에서 어떻게 일하고 싶은지 정리되고 있는 요즘이다. 그리고 떠오를 때마다 이곳에 적어본다.

  • 아직 결정나지 않은 사안에 대해 긴 논의를 이어가며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대화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 결정이 난 이후에나 논의할 수 있는 주제로 대화가 길어지는 경우가 잦았다. 현재 대화의 목표가 무엇인지 상기할 필요가 있다.
  • 크게 중요치 않거나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있는 사안에 대해서도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싶지 않다. 선택지 간에 별반 차이가 없다면, 아무거나 시도해보고 추이를 지켜보는 편이 낫다.
  • 대부분의 문제에는 팀 전체가 달려들 필요가 없다. 그 일을 해결하는데 가장 적합한 사람이 해결하면 된다. 사공이 많다고 해서 배의 속도가 항상 빠른 것은 아니다. 무조건적인 협업보다 분업이 낫다.
  • 경청하고 존중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팀장이면 더욱 그렇다.
  • 문제가 반복되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 팀이면 좋겠다. '어쩔 수 없다', '시간이 없다'라는 말보다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뭘까'라는 질문이 나와야 한다. 경영진과 팀장의 역할이 중요하다. 우선순위를 정하고 시간을 확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 경영진, 기획자, 디자이너, 개발자의 역할이 중첩되는 회사면 좋겠다. 참여자 모두가 함께 결정하면서 만들 수 있다면 좋은 제품이 나오지 않을까? 큰 회사라면 경영진 참여가 어렵겠지만, 그래도 나머지는 가능하지 않을까? 성공적인 큰 회사들은 어떻게 일하고 있을까?
published 6 months ago · last updated 6 months ago